[미디에이티드 칼럼] 세속 사회와 괴리된 개신교, 저널리즘 비롯한 미디어와의 관계 재확립해야
| 코로나19가 한국교회에 남긴 숙제들 |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전 세계는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코로나19는 의료와 보건뿐 아니라 일·교육·가정·교통·여가·관계 등 인간의 삶 전 영역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면서, 이전에는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각종 실험을 강제하고 있다. 종교 영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시대에 종교란 과연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진지한 질문들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코로나19 대확산이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라는 종교 집단에서 시작됐을 뿐 아니라 재확산의 주요 고비마다 종교와 관련한 각종 사안이 불거졌다. 코로나19의 재난과 종교는 단단한 연결 고리로 묶여 버렸다. 확산 초기부터 방역 당국의 언어로 '밀접'·'밀집'·'밀폐'로 설명되는 특유의 전통과 문화 때문에 종교는 코로나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질서와 함께하기 어려운 존재로 규정됐다. 이후 산발적으로, 혹은 대규모로 불거진 종교발 집단감염 소식과 함께, 비대면 의례를 요청·명령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일부 종교 집단의 반발은 이런 대중적 인식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흐름의 한복판에 한국교회가 있다. '신천지'와 '전광훈'이라는 두 돌출적인 아이콘과 더불어 개신교는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종교에 대한 회의적 물음을 생산한 주체로 꼽힌다. 한국교회는 이제 이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깊게 고민하고, 적절한 해답을 내놓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위기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종교 집회 금지' 긴급명령 검토에…기독교계 거센 반발(JTBC, 3/9)
교회·사찰에 가야만 신앙생활인가…코로나19가 던진 '빅 퀘스천'(<경향신문>, 3/12)
일요일마다 교회로 쏠리는 시선…개신교계 "불공정한 억압"(KBS, 3/26)
'고강도 거리 두기'에도 부활절 현장 예배 강행한 교회들(<한겨레>, 4/12)
이 와중에 수련회·집회…'코로나 근심' 키우는 교회들(<뉴스1>, 8/14)
수도권 주말 확진 70%가 교회發…대구 때보다 빠르게 퍼졌다(<조선일보>, 8/17)
저들의 천국에 난 가지 않겠다(<한국일보>, 8/18)
2020년 8월, 한국에서 개신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오마이뉴스>, 8/21)
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 있을까?(<경향신문>, 8/25)
"교회 또 교회"…밝혀진 것만 절반 이상 '교회발'(MBC, 8/27)
'공간에 갇힌 예배' 바꾸고, 교회가 시민 길러 내야(<시사IN>, 8/31)
일부라지만 대면 예배 고집…'공공의 적'이 된 개신교(<한겨레>, 8/31)
"하나님께 올리는 거라" 일부 교회 여전히 대면 예배(SBS, 9/6)
위 내용은 올해 2월부터 지속되는 코로나 국면에서 대중이 한국교회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 주는 기사 제목들이다. 신천지로부터 시작된 1차 대유행 이후 종교 집회 금지 정책에 대한 교단 차원의 반대, 현장 예배를 고수하는 대형 교회들, 교회발 산발적 집단감염, 개신교 단체 주도 8·15 집회 전후 감염자 급증, 사랑제일교회 집단감염 및 전광훈 목사 확진, 청와대 간담회에서 나온 개신교 지도자의 발언 등, 방역과 확산의 주요 시점마다 개신교의 존재감은 매우 두드러졌다.
그러나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인식이 코로나19 이후에 비로소 생겨난 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개신교에 비판적 시선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 배경과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많은 지면이 요청되므로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흐름 가운데 이번 코로나 국면은 대중의 비판적 반응을 압축적으로 가시화한 기간이었다.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이 이제는 비난과 조롱으로, 나아가 '혐오적'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한 셈이다.
일상에서 개신교인임을 밝히는 것이 공공연한 '왕따'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호소를 어렵지 않게 듣게 될 정도다. 올해 8월부터 몇몇 교회와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포스터·현수막, 소셜미디어 포스팅 형태로 등장한 것은 한국 사회에 자리한 개신교의 현주소를 방증한다.
이렇게 코로나 국면에서 '폭로된' 개신교의 민낯은 한국교회에 수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미디어와 종교의 교차점을 연구하는 모임인 '미디에이티드'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개신교와 개신교인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 보려 한다. 이 과제들은 미디어(media), 그리고 매개(mediation)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기존 인식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볼 뿐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 대중 언어 리터러시 |
이 중 하나는 세속 사회의 일상에서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language)를 제대로 익히는 일이다. 코로나 국면은 오래전부터 '세상과의 소통'을 말해 온 개신교가 정작 세상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한국교회는 대중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읽지'(reading) 못하고, 대중의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해 '쓰지'(writing) 못한다.
이 글에서는 대중의 언어로 읽고 쓰는 능력을 '대중 언어 리터러시'라고 부르려 한다. 문해력을 뜻하는 '리터러시'(literacy)가 최근 미디어 영역에 적용되면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미디어 수용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일컫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개념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 전문가들은 이 능력을 '읽기'와 '쓰기'로 구분해서, 미디어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어 내는 능력, 그리고 미디어를 활용해 자기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설득력 있는 텍스트로 써내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미디어 리터러시 논의를 읽기와 쓰기로만 단순화하는 건 무리지만, 이 개념은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을 성찰적으로 평가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논의하는 데 꽤 유용할 수 있다.
여기서 미디어를 읽고 쓰는 능력인 리터러시 앞에 '대중 언어'를 위치시킨 건,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를 언어의 문제, 즉, '대중 언어에 대한 무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세상과의 소통을 이야기한 지는 꽤 오래됐다. 소통에 대한 강조는 교회 위기 담론이 나올 때마다 이를 극복할 현실적 전략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세속 사회와의 관계 설정'이라는 개신교의 근본적 문제의식에서도 빠질 수 없는 논의였다. 즉, 세상과의 소통적 관계 설정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핵심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동안 소통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언제나 교회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왜곡'을 걷어 내고, 교회의 '진심'을 알리고 '진리'를 효과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데 방점이 있었다. 소통을 이야기할 때, 그 전제에는 세속 사회가 보내는 비판적 시선에 대한 '억울함'의 감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언어의 문제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소통의 주체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원활한 소통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언어 체계와 어휘, 문법을 사용한다는 건, 서로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공유된 영역의 확장이라는 소통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그런데 세상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의 언어는 어떠한가? 대중의 언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으며, 세상에 말을 걸 때 대중의 언어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
코로나19는 한국교회와 세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공공 영역에서 사용되는 개신교의 언어는 여전히 그들만의 '종교 언어'이다. 그들에게 통용되는 종교적 가치와 규범, 세계관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지 못한 채 발화되고 있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소리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세속 사회에서 수용되는 가치와 규범, 욕망과 결핍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니, 그 소리에 숨겨진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리 만무하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계적 수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언어끼리 단어와 의미를 일대일로 교환할 수만 있다면, 언어를 배운다는 건 매우 기계적이고 단순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건, 그 안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공유하는 사고 체계와 문화가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대중 언어 리터러시를 키워야 한다는 요청 역시 간단한 주문일 수 없다. 세속 사회와 공공 영역, 대중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뒤따라야만 하는 지난한 과정을 요구한다.
| 쓰기(writing) |
한국교회에 요청되는 공공 언어 리터러시 능력의 첫 부분은 '쓰기'다. 미디어 리터러시에서 쓰기란 미디어를 통해 자기의 생각을 잘 담아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코로나 국면에서 개신교가 세속 사회에게 건넨 메시지는 예배 중단 행정명령에 대한 교계 단체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신천지와 교회는 다르다"는 발언, 청와대 간담회에서 나온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의 발언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발언과 성명서들은 모두 코로나19 확산 과정에서 개신교에 대한 여론이 크게 악화한 시점에 나왔다. 한국교회를 대표해 대중에게 개신교의 진의를 전달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가 발표된 후 대중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졌다.
여론의 비판은 코로나19 확산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방역 정책에 대한 비협조의 논리로 "생명과도 같은 예배"와 "종교의자유 침해"를 든 점, 교회를 타 종교 및 사업장·영업장과 비교하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점 등등에 모아졌다. 이런 메시지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불안·공포 등 정신적 어려움뿐 아니라, 생업을 포기하기까지 궁지에 내몰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대중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집단으로 개신교를 규정하게 만들 뿐이었다.
대중 언어 리터러시에 필요한 쓰기 능력은 나의 말이 대중에게 어떻게 들릴지 헤아릴 줄 아는 데서 출발한다. 공공 영역에서 교회는 대중을 향해, 대중의 언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또, 그것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미리 헤아리고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고통에 직면해 있는 대중에게 현장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나, 개신교를 타 종교 및 이단과 비교하는 말은 대중의 언어일 수 없다. 너무나 한가할 뿐 아니라 현실과 유리된 언어로 들린다. 2000년대 들어 점점 심화되고 있는 세속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고립, 나아가 게토화의 증거에 더 가까웠다.
이는 마치 우리가 TV 리모컨을 돌리다 우연히 종교 채널을 만났을 때, 그 소리와 이미지가 전달하는 낯선 느낌과 비슷하다. 공공 영역에 내놓는 개신교의 목소리는 세속 사회의 대중에게 너무도 낯설게 느껴진다. 대중의 삶과 그들이 공유하는 감수성으로부터 괴리돼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중에게 이번 코로나19는 '이웃 사랑'을 그토록 강조했던 개신교가, 이를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감염병 재난의 상황에서, 어떤 논리를 앞세우며 그 가치를 내처 버렸는지를 여실히 보여 줬다. 평소 세상을 향해 내놓은 교리와 주장이 얼마나 모순이었는지를 고발하는 기간이었다. 한국교회는 대중 언어 쓰기에 실패했다.
| 읽기(reading) |
사실 이런 쓰기의 실패는 읽기의 실패에서 비롯한다고 봐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를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헤아릴 수 있으려면, 읽기를 통해 세상과 대중을 잘 알아야만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에서 '읽기' 능력은, 미디어를 비판적 시각에서 접근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어 내어 깊숙이 숨겨진 의미까지 찾아내고 이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한국교회에 요청되는 공공 언어 리터러시의 읽기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기존에 설정했던 (세속) 미디어와의 관계를 재확립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를 적대시하거나 혹은 효과적인 도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통로로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미디어가 생산하는 수많은 텍스트는 세상을 읽는 통로로 매우 유용하다. 이를 통해 첫째, 교회를 향한 세상의 목소리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세상 자체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읽어 내야 할 미디어 텍스트에는 먼저 저널리즘이 있다. 저널리즘 텍스트를 제대로 읽으려면 한국의 저널리즘이 기반하고 있는 기본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저널리즘 미디어는 세속 사회의 규범에 의거해 각종 사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의 원리에 따라 저널리즘 활동을 수행한다.
따라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언론의 기본 조건이며, 권력을 독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다종교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을 존중하고, 종교 영역에서 다원주의적 접근을 규범으로 삼는다. '권력에 대한 감시'라는 저널리즘의 본령은 제도 종교에 대한 보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에 대한 저널리즘 미디어의 비판이 두드러지는 건, 개신교를 한국 사회의 주요 권력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저널리즘 텍스트가 생산되는 맥락에서 작동하는 이런 원칙과 규범을 이해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그 의미를 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 내기 위해 교회가 노력을 기울이려면 이런 맥락을 촘촘히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역시 한국교회가 읽어야 할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흔히 오락과 휴식의 영역으로만 간주되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는 저널리즘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가치와 규범의 영역에 속한다. 오히려 현실 정치와 가시적 권력을 다루는 저널리즘과는 다르게 가벼운 마음과 태도로 접근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치의 차원에서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더 클 수 있다.
여기에는 세속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경합하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사회의 변화와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또한, 사람들의 욕망과 결핍을 읽어 낼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상업적 성공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세속 사회에서 대중이 욕망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떠한 결핍이 존재하는지를 가장 예민하게 짚어 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를 값싼 오락거리로만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비판적 읽기를 통해 세속 사회의 시대적 맥락을 파악하고, 대중이 공유하는 동시대 감수성을 파악하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 미디어로 읽는 한국교회 향한 세상의 '기대' |
한국교회는 대중 언어 리터러시를 계발해서 시대를 읽고, 사람을 읽고, 그 속에서 교회의 모습을 읽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복음의 진리를 대중의 언어로 '번역'해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 국면에서 생산된 미디어 텍스트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세속 사회로부터 괴리돼 있으며, 세상과 소통적 관계를 맺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써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줬다. 동시에, 재난의 시대에 한국교회를 향한 세속 사회의 '기대'는 무엇인지, 또 이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무엇인지도 가르쳐 준다.
코로나 국면에서 미디어가 개신교를 향해 보내는 비판적 시선은 절망에 가까웠다. 세속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괴리된 한국교회를 매우 비관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를 더 깊이 있게 분석해 보면 개신교를 향한 미디어의 '역설적 기대'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8월 21일 자 <한겨레>에 실린 만평을 보자. 8·15 집회를 전후해 2차 대유행이 시작될 무렵, 현장 예배를 강행하고 집단감염을 일으킨 개신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배 강행 일부 교회"라는 캡션과 함께, 창밖으로 보이는 네온사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두 인물이 있다. 성경 옆에 선 어린아이 한 명과 예수로 보이는 또 다른 인물.
이 만평은 제도 종교로서 개신교와 예수를 분리한다. 방역 노력에 역행하는 개신교를 향한 비판의 시선을 미디어와 예수가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그린다. 독자·미디어, 그리고 예수가 같은 시선으로 제도 종교로서 개신교를 바라본다. 이로써 현재 제도 종교로서 한국교회가 보여 주는 모습은 개신교의 본질을 상실한 결과이며, 그 본질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세속 사회의 기대는 완전히 철회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비판에는 언제나 '충족되지 않은 기대'가 전제된다. 미디어의 기독교 비판 역시, 세속 사회가 교회를 향해 지닌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향한 미디어의 비판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미디어의 비판을 통해 읽어 낸 종교를 향한 세속 사회의 '역설적 기대'라 할 수 있겠다. 코로나19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패턴이다.
이런 기대는 코로나 국면 이전에도 종교를 다루는 미디어의 다양한 모습을 분석하면서도 발견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 시대에 종교의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세속 사회는 아직 '그렇다'라는 답변을 완전히 거두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의 본질 회복을 향한 세속 사회의 기대는 갱신과 개혁을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과 방향 설정에도 소중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국면은 한국교회에 세상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대중 언어 리터러시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중 언어 리터러시를 계발해야 할 이유는 교회가 세상을 좇아야 하거나, 교회가 세상에 종속돼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숙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미디어는, 그리고 대중 언어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박진규 / 미국 콜로라도대학교에서 미디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언론학회 종교와커뮤니케이션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