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중독에 빠진 사교 집단에서는 종교적 권위에 의한 추종자 학대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기독교 사이비 집단 내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반적인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빛과진리교회 내 교인 학대 의혹이나 인천새소망교회 목사의 그루밍 성범죄 등은 한국교회가 더는 종교 중독을 사교 집단만의 문제로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종교적 권위와 학대

종교 중독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권위에 의한 학대 문제를 일으킨다. 교회 사유화와 교회 지도자 숭배가 진행될 때, 교회 지도자는 추종자들이 자신의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는 통제 상황을 통해 기분 전환 체험을 한다. 자기 정체성을 건강하게 형성하지 못한 교회 지도자는 더욱 권위에 집착하고 추종자들에게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삶의 양식을 강요하며 자기 말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권력 중독이 심화할수록 종교 지도자는 더 많은 요구를 하고, 강도도 강해지면서 추종자를 학대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교인들을 학대하는 현상을 혹자는 '영적 학대'(Spiritual Abuse)로 규정하기도 한다.1) 이 용어는 '영적'이라는 말에 담긴 다층적 어감 때문에 영미권에서도 꽤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2) 하지만 오늘날에도 '종교적 권위에 의한 학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적 학대는 종교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가 자신을 신뢰와 존경으로 따르는 사람을 억압·지배하고 조정하며 착취할 때 발생한다. 종교 중독 증상을 보이는 교회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교회를 사유화하면서도 하나님 뜻인 것처럼 포장해 맹목적 복종을 요구한다. 숭배 대상이 된 교회 지도자 요청에 추종자는 정신적·물리적 폭력과 재정적 착취나 성적 착취 등을 당해도 이를 비판하거나 거부하지 못한다.

영적 학대의 두 가지 측면

영적 학대는 한국교회에서 낯선 현상이 아니다. 영적 학대는 가정 폭력처럼 힘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 일방적으로 정신적·물리적 폭력을 가할 때와 유사한 문제를 발생하게 하는 대단히 위험한 현상이다.3) 영적 학대는 신앙적·사회적 측면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신앙적 측면에서 영적 학대는 '연자 맷돌의 비유'(마 18:6)와 같이 영혼을 죽이는 행위이다. 영적 학대를 받은 추종자는 공동체를 떠난 후에도 개인적 차원의 외상을 안고 기독교 신앙에 불신을 품으며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를 형성한다.

사회적 측면에서 영적 학대는 종교적 위력에 의한 범죄이다. 신옥주 사건처럼 종교적 위력 행사는 사교 집단에서 종종 발생한다. 우리나라 형법 제303조에 따르면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자신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을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되어 있다. 위력威力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유·무형적 세력을 뜻하며, 폭행·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나 권세도 포함된다.4)

타인의 의사를 제압하는 힘이 업무와 관련될 경우 업무상 위력 행사의 범죄가 된다. 종교와 관련될 경우 종교적 위력 행사의 범죄가 된다. 영적 학대는 결국 종교적 위력에 의해 다양한 측면에서 추종자를 착취하는 현상이다. 재정적 착취나 성적 착취 등의 문제는 종교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범죄이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추종자

종교적 권위에 의한 학대, 즉 영적 학대에 한국교회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적 학대가 종교 중독자를 종교적 위력 행사에 의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먼저 영적 학대는 총체적으로 인간성을 파괴한다. 인간의 정신(psyche), 마음(mind), 몸(body)은 서로 맞닿아 있고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인간을 향한 학대는 정신적 방식이든 물리적 방식이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다.5) '영적'(spiritual)이라는 용어의 모호성과 총체성에도 인간의 초자연적 부분과 자연적 부분은 상호작용한다.6) 영적 학대는 인간 됨의 기반인 인간성을 무너뜨려 추종자를 피해자로 만든다.

영적 학대는 그 학대 피해자를 동시에 가해자로 만들기도 한다. 종교 중독에 빠진 이들은 영적 학대를 겪어도 종교 지도자를 향한 집착·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인적 삶이 망가지는 일을 경험하면서도 혼자서는 집착 대상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이때 가족이나 친구, 중독 치유 전문가 등 외부에서 개입해 피해자가 종교 지도자(혹은 집단)와 단절하거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험을 하면 금단증상을 보인다.

특히 외부 개입으로 종교 지도자(혹은 집단) 권위가 손상을 입을 때 개입 주체를 향해 '과도한 폭력성'(excessive violence) 혹은 '폭력적 공격성'(violent aggression)을 표출한다. 안타깝게도 재정 착취나 노동 착취, 성 착취 등 추종자 학대가 발생한 교회의 경우, 추종자들이 내부 고발자나 비판적 언론(혹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향해 폭력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한국교회 내
집단 압력과 자기혐오

인간은 사회적·집단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종교적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그 압력은 절대적이다. 종교 중독으로 영적 학대 기간이 길어질수록 학대 강도는 더욱 강해진다. 추종자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학대 기제도 더욱 교묘해지기에 추종자는 강압적 압력에 더욱 무기력해진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교회 내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종교 중독을 묵인하는 교회는 교인들에게 스스로 하나님의 기준을 고수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을 격하하면서 추종자들을 통제하려 한다.7) 종교 중독자는 집단의 기대에 순응했을 때 얻는 승인에 매우 의존적이다. 따라서 뚜렷한 규칙·요청·명령 등에 순응하고, 그 대가로 얻는 무언의 혹은 암시적 승인을 통해 감정의 고양과 만족을 느낀다.8) 그러므로 종교 중독자는 영적 학대를 경험할 때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자기혐오에 빠진다.

집단 압력과 자기혐오라는 영적 학대 기제는, 약화된 형태이기는 하나 한국 근본주의적 교회 공동체에서도 작동한다. 대표적 예는 바로 근본주의적 대형 교회에서 종종 강조되는 '겸손'의 미덕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겸손'은 외적 강요가 아닌 인격적 변화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왜곡된 의미의 '겸손'은 결국 '담임목사에 대한 복종'을 유도하기 위한 도구로 남용된다. 인격적 변화가 아니라 자존감을 무력화하는 겸손은 자기 학대를 조장해 그리스도인을 쉽게 통제할 수 있게 만든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존감과 교만을 종종 동일시한다. 이들은 낮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이들을 '겸손한 사람'으로 포장한다. 낮은 자존감은 종교 중독의 개인적 요인 중 하나이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종교 집단 내에서 자기 의지를 내세우지 않고 집단이나 지도자 요구에 복종하는 수동적 삶의 자세를 취한다. 종교 지도자 말에 복종하고 순응했을 때 얻게 되는 긍정적 반응에 집착해 종교 중독에 쉽게 빠지고, 영적 학대를 받을 때 자기혐오로 이를 정당화한다.

성서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타인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레 19:18; 마 22:39). 기독교적 사랑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건강한 자존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권력 중독에 빠진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적) '죄인' 정체성을 억압 기제로 사용한다. 왜곡된 자기 정체성은 교회 구성원을 자기 학대로 몰아간다.

자학은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자아의 실패이다. 종교 중독자의 도덕적·윤리적 자학은 자신에 대한 집단 내 도덕적 비판이나 비난을 피하려는 자기방어 기제일 뿐이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이 극단적 자기혐오로 자기 파괴적 행동 양식을 보일 때 이를 멈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파시즘과 차별 기제

종교 중독이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다양한 방식으로 추종자를 착취하는 영적 학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기독교 파시즘도 일인 독재자를 제외한 모든 시민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사회적 학대를 일으킨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외상 장애를 겪는 사람이 매력을 느끼는 종교 집단이나 지도자가 있다. 이들은 보통 외상 장애를 겪는 사람의 현실 도피 욕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해 주면서 어떤 외상 장애에도 온전히 품어 줄 것 같은 환상을 심는다. 파시스트들과 지도자의 경우, 초기에는 집단 외상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현실의 난제들을 집단주의적이면서 국가주의적(혹은 국수주의적) 운동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 준다. 도피를 통해 개인적 차원의 절망감과 좌절감을 해결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

'국수주의'(Ultranationalism)란 '극단적 국가주의'(extreme nationalism)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기존의 국가 체제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국가 체제를 지향하는 운동과 결합하면 파시즘으로 발전한다. 파시즘은 집단 전체를 신성시하면서 개인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이때 이 집단은 국가 혹은 민족으로 대표되며 동시에 신성화한다. 이탈리아 초기 파시즘은 "기존의 보수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과 함께 극단적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있던 정치적 운동에서 출발했다.9)

그러므로 파시즘은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따라서 개인의 삶을 용인하는 것도 개인의 이익이 국가와 일치하는 경우에 한정"하며, "국가의 권리를 개인의 참된 본질에 대한 표현임을 재천명"한다.10) 파시즘의 국수주의 경향은 초기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국가의 적으로 상정하고, 이들에 대한 강력한 차별을 정당화하며 더욱 강해진다.11)

파시즘 이데올로기에서 다양성은 불일치를 의미하며, "불일치는 바로 배반"으로 이해된다. 파시즘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차이를 인정할 수 없기에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하고 거짓으로 포장해 일치를 강요한다. 파시즘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좌절에서 분출"되며 "좌절된 중간 계층들에 대한 호소"로 성장한다. 이들은 "어떤 경제적 위기 또는 정치적 모욕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사회적 하층 집단들의 압력에 놀란 중간 계층들"이다. 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위협하는 현실 문제를 동일한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해 외면하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단결한다.

외국인 혐오나 인종차별은 파시스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프로파간다이다. 특히 가상의 적을 만들어 사회적 위기감을 고조시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의 비합리성으로 일상적 상황에서 지지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들은 종종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그 존재 자체를 사회적 위협으로 호도해 지지를 얻으려 한다.

기독교 파시즘 속에서 차별 기제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국수주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파시스트들은 국가 공동체를 구약의 이스라엘과 동일시해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독교 파시즘을 떠받치는 정치적 정당성과 종교적 정당성은 사회적 학대를 강화하며, 점차 학대 대상을 확장시켜 공포감을 통해 완전하게 통제하려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파시즘이나 차별 기제는 정치적 비판뿐 아니라 신학적 비판을 통해 해체할 필요가 있다.

인종차별에 대한 신학적 이해

기독교 파시즘은 인종차별을 정치적이고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에 학대 행위가 더 극단적이면서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파시즘의 차별 기제는 동일한 국가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동일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권리를 누린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단결시키고 조종한다.12)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는 "자신의 인종 그룹에 대한 인종 중심적인 자부심, 이러한 그룹 특유의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인 유형의 특징들에 대한 우대, 다른 인종적 그룹들을 차별하고 공동체의 삶에로의 완전한 참여로부터 배제하려는 압박과 연결된 다른 그룹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의미한다."13) 사실 "인종적 차이에 관한 온갖 주장은 신화일 뿐 실제 인간의 능력이나 행동과 아무 관련이 없다."14)

인종차별주의자는 왜곡된 인간관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인종 특징들을 인간 자체와 동일시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나는(혹은 우리는) 희다'라는 자신(혹은 일부 집단)의 인종적 특징을 곧 인간을 규정짓는 보편적 가치로 치환한다. 절대화한 인종적 특징은 다른 인종들을 '하류 인간들'이며, 낮은 가치와 미미한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 천시하게 만든다. 이러한 차별 기제로 다른 인종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적 존재로 전락하고, 다른 인종의 문화는 후진적으로 여겨진다.

차별 기제를 받아들이면 우월적 존재가 후진적 존재를 학대하는 일은 정당하며 후진적 존재는 우월적 존재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착화된다. 인종차별주의는 언제나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을 통해 정립되는, 부정적이고 경직된 공격적 정체성을 강화한다.15) 한국교회 내 반이슬람 운동이 인종차별적 현상을 공유한다.

1) 데일 라이언/정동섭 옮김, 『중독 그리고 회복』 (서울: 예찬사, 2005), 175.
2) Lisa Oakley & Kathryn Kinmond, Breaking the Silence on Spiritual Abuse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3), 7.
3) 라이언, 『중독 그리고 회복』, 177.
4)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과 관련된 대법원 2007년 8월 23일 선고 2007도4818 판결을 참조하라.
5) 게리 R. 콜린스/정동섭 옮김, 『폴 투르니에의 기독교 심리학』 (서울: IVP, 1998), 54-55.
6) W. B. 클리프트/이기춘·김성민 옮김,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17.
7) 아터번·펠톤, 『해로운 신앙』, 46.
8) 메도우·카호, 『종교심리학 하』, 341.
9) Passmore, Fascism, 10.
10) 데이비슨 뢰어/정연복 옮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서울: 샨티, 2007), 146.
11) 앞의 책, 145.
12) 에코,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2009), 102-103.
13) Moltmann, "Die Befreiung der Unterdrücker," 528.
14) 켄 올렌데, "인종차별과 이민자 규제," 『계급, 소외, 차별』 (서울: 책갈피, 2017), 223.
15) Moltmann, "Die Befreiung der Unterdrücker,"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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