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의 패러다임 시프트

우리는 올해 2월 말, 그리스도의 생애 주기에 따른 교회력 절기상 2020년의 사순절(Lent)을 '코로나19'라는 예상치도 못했던 초유의 사태와 더불어 시작해야 했다. 한국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완전히 새로운 예배,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게 되었고, 부활주일을 지나 부활 절기(Eastertide)를 살아가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이런저런 위기를 통과해 내고 있다.

신앙인들이 한 시공간에 모여 함께 예배하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 됨을 힘써 지키기'를 누구보다 기뻐해야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자 진리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과정을 어떻게 잘 견디고 버텨 가야 할지에 대해 성서적으로-역사적으로-신학적으로 철저히 성찰하며 모두가 '거룩한 힘'을 모아야 한다.

오늘날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를 비롯해 천재지변처럼 여러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 시시각각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그때그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혜들로 갖가지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만 한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고, 어떻게 우리 믿음과 신앙을 지켜갈지에 대해 보여 주셨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기에 힘쓰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모이기에 힘쓰는 것만큼 흩어지기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 성령을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명하셨던 '지상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a, 개역개정)."

주님은 '제자화'된 우리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할 수 있는 길을 일찍이 예비하셨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하시며(마 18:20), 주님의 영이 계신 그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고후 3:17).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한 분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복된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열어 놓으셨다. 따라서 무소부재하사 언제 어느 곳에 거하든지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로 동행하시는 주님께 항상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줄곧 이어 온 기독 정신이기도 하다. 당대 로마제국의 외압 가운데 기독교가 국교화하지 않은 시절에도 '카타콤'(Catacomb)에서 함께 모여 은밀히 예배하던 선조들의 신앙 유산을 기억하는가? 오늘날에도 첨예한 이슈 가운데 있는 선교지의 '지하 교회'(Underground Church)에서 남몰래 각자의 신앙과 믿음을 목숨처럼 지켜 가는 자들이 있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할 때 어느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만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님을 모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거룩한 예배의 처소가 된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사 각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고, 또 흩어져서 예배하는 현장에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이것은 흩어짐으로 복음이 전해졌던 디아스포라의 역사, 우리가 함께 예배드림으로 오늘날 이 땅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로 부흥을 이루게 하신 여러 증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사도 바울도 분명히 말했다. 우리가 한 몸,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된 교회의 지체로 부름 받아서 모이기에도 힘쓰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가 되고, 편지(고후 3:3)가 되어 나누어짐으로-전하여짐으로-흩어짐으로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초대교회 정신, 또한 신약시대에 예배가 처음 탄생하게 될 때의 마음을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간에 실제로 적용해 보면서, 여러 시련과 어려움을 헤쳐 나갈 귀한 길잡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그동안 내가 빌딩이나 건물의 개념에 갇혀서 예배드리는 행위만을 예배라 정의하며 신앙생활하지는 않았는지',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순간에도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영과 진리로 충만히 예배할 수 있는지….' 이러한 자기 성찰의 진중한 물음을 통해 예배의 본질을 바르게 붙잡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금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갈 결정적 기회 앞에 우리가 서 있다.

예배의 패러다임 시프트

코로나19 사태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예배를 이어 가고 신앙을 지켜 갈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 상황을 비관하며 마냥 정죄의 대상을 사냥하는 것보다, 모두가 함께 힘을 합치고 마음을 모아 눈앞에 닥친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별히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를 힘껏 축복하고 싶다. 현시대에 인류가 누리고 있는 훌륭한 기술들을 활용하여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해 여러모로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섬김으로 취약 계층에 놓인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 믿음의 끈을 붙잡은 채, 오늘 하루를 버텨 갈 은혜를 허락받고 있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된다. 현재 교회마다 앞다투어 송출하는 '영상 예배', '온라인 예배'의 기획에 앞서 충분한 기도와 고민, 성서적 물음과 신학적 성찰, 성도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합일된 입장의 이해가 있었는지 말이다. 혹시, 문제가 닥치고 보니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니까 우리도 빨리 기술을 터득해서 똑같이 해야지'라는 상황적 방법론이 그 시작을 주도하지는 않았을까? 돌이켜 보니 필자도 지난 두 달간, 자신이 섬기는 교회명으로 급히 개설한 유튜브 계정 라이브 스트리밍을 위해서 '구독' 버튼을 눌러 달라는 부탁을 주변 지인들로부터 적잖이 받았다.

그런데 무조건 꼭 그래야만 할까?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1인 가구, 독거노인 등 취약 계층이나 가족 구성원 중 혼자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기본 기자재만 허락된다면) 이러한 예배 접근성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러한 특수 상황의 성도들이 도리어 낯선 예배 환경 가운데 소외되는 경우도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어떠한 식으로든 가정에서 예배해야 하는 오늘날의 경우, 무조건적으로 공급·수용되고 있는 영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의 구조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왜 가정에서 주체적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일까? 피로 섞인 혈연 친족 집단만이 가족이라는 형태의 정답이자 전부는 아닐 텐데, 도리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 한 몸을 이룬 하늘 가족인 교회 공동체가 초대교회적 영성으로 모이고 예배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혹은, 단순히 안수받은 성직자가 없다고 해서 예배할 수 없는 것일까? (설교가 곧 예배 자체는 아닌데) 설교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예배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빵빵한 반주 음악이 있어야만 찬양이나 예배 자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소규모 집단으로는 주체적으로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핑계들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이제껏 많은 교회는 명절 때가 되면 그보다 한 주 앞선 주일에 가정에서 예배하라며 약식으로 구성된 '가정에서 드리는 명절 예배' 순서지를 친절하게 제작해서 꾸준히 배포해 왔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지금의 상황에서 교회는 확장된 의미의 가정을 바탕으로 온 세대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독려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만약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보다 더한 시련이 불현듯 닥쳐서 인터넷이나 전기를 아예 사용할 수조차 없는 위기의 때가 온다면, 그때 당신은 진정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는 어땠을까? 2000여 년 전 신앙의 선조들이 카타콤에 숨죽여 모여서 '마라나타!'를 외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던 때에는 어떻게 그 모든 게 가능했단 말인가. 미래도, 과거도 아닌 2020년 현재는 또 어떠한가? 저 북한, 저 열방의 어느 지하 교회에서 목숨을 담보로 가슴 졸이며 한 분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예배'는, 지금 우리의 예배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 것일까?

예배에 대한 이러한 예시들이 너무 극단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이미 온갖 극단적인 결과들이 미디어를 장식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문제가 없었을 때는 예배의 갱신을 거듭하면서 더한 자극을 쫓기에 바빴고, 위기가 닥친 순간에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모면의 기술에 능했음을 겸허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폭풍 같은 세상 속에서,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믿을 수 없는 시기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들어야 한단 말인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늘의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모범이 보여 주셨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골방에서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자, 우리 주님께서 이 세대에 도전하시는 거룩한 물음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나는 모든 게 전부 사라져 버린 순간에도 진정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넘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그토록 회복하고자 부르짖는 초대교회의 예배도 결국 함께 모여 예수님을 생각하고(떡을 떼고), 가르침을 읽고, 찬양하고, 기도했던 모임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족끼리(또는 교회 내 여러 부서별 소그룹 구성원들이) 둘러앉아 같이 말씀을 읽고, 묵상을 나누고, 함께 손잡고 기도하며, 화음을 맞추어 찬양했던 마지막 기억이 언제인가? 몸 된 한 교회를 섬긴다면서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예배를 드려 왔던 이들이, 진짜 말씀대로 '하나 됨을 힘써 지키며 우리 안에 허락하신 사랑을 뜨겁게 확인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일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다시금 진정 우리가 회복해야 하고, 또 돌아가야 할 예배의 진짜 정신을 살아 낼 수 있는 지금의 시간 속에 매복하고 있는 '예배의 은혜'를 꼭 발견하고 누려 가길 소망한다. 주일 오전 거실에 모여 있던 가족들이 11시가 되자 각자 부서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겠다며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던 상황이 너무 슬펐다던 어느 한 소녀의 고백이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참된 부활의 영광을 맛본 거듭난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부활 절기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다소 왜곡되었거나 편향되었던 예배자로서의 기준, 혹은 건강하지 못했던 예배를 향한 어떤 맹신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여러 상황 속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메시지들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시금 본질로 회귀하면서, 어떠한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기도가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의 상황을 비관하면서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교회가 위기의 순간을 기회 삼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예배의 정신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어느 곳에서나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늘 넘치는 예배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오석진 / 감리교신학대학교 예배학 교수, 샬롬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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