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C. 앨리슨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비아)
[뉴스앤조이-여운송 기자] <역사적 예수와 신학적 그리스도>가 아니다.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다. 여기서 '롯데의 선동열과 해태의 최동원' 같은 이질감을 곧바로 감지한 독자라면, 이 책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랜 기간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몰두해 온 저자 데일 C. 앨리슨(프린스턴신학교 신약학)은 이 책에서 그동안의 역사적 예수 탐구가 남긴 종교적 의미를 고찰하고, 연구자로서의 자전적인 고백(?)들과 더불어 이 탐구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한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그리스도교신학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25쪽), "현대 역사 비평은 배교자들이 마지막으로 거치게 되는 학교"가 아닐까?(30쪽), 학자들마다 재구성하는 예수의 모습이 왜 이리도 다른가?, 역사적 예수 탐구가 금과옥조로 여겨 온 방법론적 기준은 과연 적절한가?, "그리스도교인들은 실제 예수에 관해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96쪽) 등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던져 봤을 법한 질문들을 다루면서, '흔들림 없는 역사적 사실 위에서만 성립되는 신앙' 혹은 '신앙은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실제로서의 역사'라는 이분법적 양극단을 피하고, 그리스도교인이자 역사가로서 두 정체성에 모두 정직하기 위해 노력한다(187쪽). 저자가 거쳐 온 실존적인 고민의 과정과 동료 학자들에 대한 비판, 학자로서 정직함을 추구하며 내린 잠정적 결론은, 그 자체로 독자들이 지니고 있던 어떤 익숙함에 균열을 내고 성찰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신학적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목소리가 담겨 있다.
"독자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이 책은 변증가의 확신에 찬 목소리나 회의주의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닌, 종종 혼란을 겪었던 한 개신교인이 오랜 기간에 걸쳐 다다른 (그리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더듬거리며 나온 목소리를 담고 있다. 내일도 내 불확실한 생각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다. 첫째, 변화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으므로(바위는 늘 바위다) 배움을 통해 생각이 바뀌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장려해야 할 일이다. 둘째, 시험받지 않은 그리스도는 만날 만한 가치가 없다." ('간략한 개관', 21~22쪽)
"현존하는 1세기 예수 전승 대부분이 공관복음에 들어 있으므로, 우리가 재구성한 예수는 불가피하게 공관복음의 예수와 닮을 수밖에 없다. 즉,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다. 그 밖에 우리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략)
어떤 관점에서는 내 결론이 보수적으로 보일 테고, 어떤 관점에서는 보수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특정 어록이나 이야기가 실제 예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논증해 보일 수 있다는 주장에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척하는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복음서들은 비유다.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가 실제로 한 말인지 실제로 한 행동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예수는 이런 식으로 행동했고, 이런 식으로 말했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3장 '어떻게 연구를 진행할 것인가', 160쪽)
"슈바이처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결론을 말하면, 역사적 예수는 여전히 이방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나는 이 결론이 그다지 끔찍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적 꿈을 흐트러뜨리는 예수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분명 복음서의 예수는 현실 안주, 자기만족과 싸우는 인물이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인든 간에 우리의 신학을 확증해 주는 역사적 예수는 현실 안주와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의 의견을 칭찬하는, 길들여진 예수는 결코 예수가 아니다." (4장 '곤란한 결론들', 213~21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