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⑫] 기독교대한감리회 성차별적 법에 맞섰던 김명희 목사

<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는 교단 초기부터 여성 안수를 도입했다. 다른 교단보다 먼저 여성 목사를 인정한 감리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72년 '담임자로 결혼한 여자 목사는 담임을 계속할 수 없으나, 기관에서는 계속 시무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사실상 결혼한 여성에게 목사직을 주지 않겠다는 이 차별 조항은 1989년까지 17년간 존속했다. 감리회 김명희 목사(66)는 자신이 쓴 회고의 글 '여성 안수가 이루어지기까지'에서 이 조항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목회에 대한 사명이 불탔어도 한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이 법 제도는 미래의 계획과 희망을 갖기에는 감당키 힘든 거대한 공룡과 같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적극적으로 사는 일을 방해했으며, 무기력함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데 이렇게 한 인간의 인생을 짓밟아 놓는 것인가? 그것이 무엇인데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려 하는가? 하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김명희 목사는 직접 당사자가 되어 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는 1986년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나눔교회를 개척하고 '결혼한 여성 담임 사역자'로서 빈민 사역을 펼쳐 나갔다. 동시에 목사 안수 과정을 밟아 나가며 성차별 조항 철폐 운동에 힘썼다. 사회에서 소외당한 빈민 여성을 위한 그의 현장 목회는 그자체로 여성 해방 운동인 동시에, 자신을 비롯한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투쟁 과정이었다. 

싸움은 끝내 승리했다. 감리회 사상 처음 있는 일에 법 해석을 위한 위원회가 소집됐고, 1989년 마침내 차별 조항은 철폐됐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교단 내 정파 싸움에 휘말려 큰 고충을 겪었고, 법 개정 이후에도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6년이나 걸렸다. 믿고 의지했던 여성 사역자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이 사건 때문에 마음 깊이 상처를 받기도 했다. 교단 내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성이 여성 간 연대를 가로막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김명희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김명희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여성 목회자를 '성녀'로 보던 시절

저는 45년 전인 1976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어요. 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여성 목회자를 차별하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선배들이 그 조항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는 '이제 곧 나의 미래가 될 테니까 차츰 바꿔 나가는 게 옳다'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아요.

사회가 가부장적이었으니 교계에도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부수적인 존재로 보는 인식이 깔려 있었어요. 여성은 사람이 아닌 거예요. 다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인식이 차별 조항을 만든 것 같다고 느꼈어요. '여성에게 주어진 미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직접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더라고요.

1978년 학내에서 선교신학회라는 사회운동 단체를 조직했어요. 제가 초대 회장을 맡았죠. 그 무렵에는 국가적으로 계층 문제, 농민 문제, 노동문제 등 사회적 문제가 처음 수면 위에 떠오르고 있었거든요.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계층 문제 등과 여성 문제가 교차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운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거부 반응이 심했기 때문에 '신학회'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거예요. 저는 그때부터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을 시작했어요.

제가 엄연히 한 단체의 회장이었잖아요. 사회운동 특성상 논의 과정도 많았고, 논의를 통해 결집한 내용을 행동에 옮기거나 글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할 때마다 위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어요. 위원 중 여자는 거의 없고 전부 다 남자 동료나 후배들이었는데요. 회의가 끝나면 저한테 와서 그러더라고요. "누나, 그래도 여자인데 그렇게 앞장서서 이야기하면 우리가 뭐가 됩니까." 저를 회장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봤던 거죠. '어떻게 여자가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거였어요.

그 당시에 여성 목회자에게는 '성녀'에 가까운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어요. 여성 목회자가 결혼한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죠. 그러니 '결혼한 여자 목사는 담임을 계속할 수 없다'는 조항을 교단 헌법에까지 넣게 된 거예요. '목회는 남성만 하는 거고, 여성은 결혼해서 사모를 하든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다', '여자가 목회한다는 건 그런 걸 다 포기하고 하나의 성스러운 여성이 되어 일하는 거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어요. 그것만큼 커다란 성차별이 어디 있겠어요. 차별적인 인식이 법에 반영돼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목회자 후보생들까지 여성의 리더십을 부정했죠.

그러면서 제가 갖게 된 철학이 두 개 있어요. '목회하는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를 부르짖는 남자와도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 당시는 유신 시대였고 한국 사회변혁기였으니까 저도 사회운동을 참 많이 했는데, 소외되는 경험이 많았거든요.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성들은 그저 보조적인 존재, 성적인 대상이었죠. 운동하는 여성들이 굉장히 아팠던 게 뭐냐면요. 여성도 하나의 인간이자 동지로서 사회를 향한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게 아니라, 여성은 남성을 보조해 주는 수단이라는 인식이 그 안에도 팽배해 있었던 거예요.

감리회는 교단 초기부터 여성 안수를 도입했지만, 결혼한 목사는 교회를 담임할 수 없다는 성차별 조항이 1989년까지 존속했다. 사진은 1933년 안수를 받은 여성 선교사들. 
감리회는 교단 초기부터 여성 안수를 도입했지만, 결혼한 목사는 교회를 담임할 수 없다는 성차별 조항이 1989년까지 존속했다. 사진은 1933년 안수를 받은 여성 선교사들. 
"제가 결혼도 하고, 목회도 하겠습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부터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졸업하고 보니 여성 사역자로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해 나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게 이 차별 조항이더라고요. 이 사회에 하나님의 손길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셨는데, 제도가 그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어요. 분노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서 제 앞에 놓인 바위를 헤쳐 나가는 게 저의 신학이자, 목회이자, 길이라고 고백했어요.

1980년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단 한 교회에 전도사로 취직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그해 창립한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에서 6년간 활동했어요. 당시는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빼고는 모든 교단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되지 않았거든요. 여신협을 중심으로 각 교단이 연대하면서 범교단적·범조직적으로 여성 안수 운동이 시작됐어요. 저는 교단 안팎에서 여성 안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작업, 신학적으로 증명하는 작업, 그 의미를 공유하고 의식화·공론화하는 작업을 했어요. <기독교사상>에 '여성 성직자의 현황과 문제'라는 논문도 써냈고요.

교단 내부적으로는 선배들이 해마다 차별 조항을 철폐해 달라는 청원을 올렸어요. 하지만 총회는 꿈쩍도 안 했죠. 저로서는 이제 단독 목회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전히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거예요. 마침 또 제가 연애하던 사람이 있었는데요.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이었어요. 고민이 되는 거예요. 목회를 해야겠는데, 결혼하면 못 하게 돼 있으니까요. 결혼이냐, 목회냐를 강요받게 된 거죠.

하루는 이 문제를 두고 선배들과 상의하면서 제 입장을 밝혔어요. "우리가 그동안 끊임없이 청원을 해 왔지만 안 바뀌었습니다. 앞으로도 청원만 계속해서는 절대 통과 안 됩니다. 실제 사례가 있어야 하고, 논의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게 중요합니다. 결혼할 사람도 있고 하니, 제가 결혼도 하고 목회도 하겠습니다." 선배들은 반대했어요. 저를 걱정한 거죠. "어차피 법으로는 안 되니 일단 결혼해라", "목회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지 않겠냐"고 그랬어요. 그런데도 제가 강경한 입장을 계속 고수하니까, 그럼 교회를 개척할 때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일하던 교회에서도 지원 못 해 주겠다고 하셨죠. 의지했던 양쪽으로부터 지원이 전부 끊긴 거예요.

그래도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첫 시도를 제가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교회를 개척하려면 실질적으로 재정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잖아요. 안 도와주겠다는데 어떡하겠어요. 그래서 일단 결혼은 좀 접어 두고, 교회에서 사임하면서 받았던 퇴직금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했어요.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이야기인데요. 1986년 8월 이화여자대학교 운동장에 여덟 명이 모여서 예배를 시작했어요. 참 많이 슬펐어요. 서러웠고. 그때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저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었겠지만, 불합리한 제도를 바꿔 나가고자 하는 노력에 믿고 의지하던 이들이 협조해 주지 않는 게 너무 아프더라고요.

교단에서는 6개월 후에야 개척 공고를 내줬어요. 예배당이 없다는 이유였어요. 공고가 나자마자 곧바로 결혼했는데요. 아마 한 달 정도까지만 목사님들께 사랑받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젊은 여성 사역자가 교회를 시작하는 게 기특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예뻐도 하셨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많은 분이 돌변했어요. 그동안 알고 지내던 남자 동료나 후배들은 제 결혼식에도 거의 안 왔어요. 여성 사역자는 '성녀'여야 한다는 남성들 인식을 아주 뚜렷하게 보여 줬죠. 지방회에 가면 임신한 저를 향해 "식사가 1인분인가, 2인분인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어요. "3인분일 수도 있죠"라고 응수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악물고 버텼죠.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회 목사님들이 제 안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저만 법을 어긴 게 아니라 제가 속한 지방회에서 법을 어기게 된 셈이잖아요. 난감한 문제였죠. 전도사로 파송시켜 놨는데 물릴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그분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결혼한 여성 목사는 담임 목회를 불허한다는 조항을 저만큼 들여다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동안에는 '담임할 수 없기 때문에 안수를 줄 수 없다'고 해석해 온 건데, 거꾸로 하면 '목사 안수를 받아도 담임만 안 하면 된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결혼해도 담임만 안 하면 안수는 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 목사님들은 거취를 물으면서 제가 스스로 포기하도록 무언의 압박을 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만약 안수받은 후에 법 조항에 저촉된다면, 담임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목회하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어요. 목사 안수 받기까지 과정이 있으니, 속으로는  그 기간 안에 법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목사님들이 제 얘기를 쉽게 납득하지는 않으시더라고요.

교리와장정의 성차별 조항은 폐지됐지만, 2005년 '부부목회자는 같은 교회에서 담임자와 부담임자로 사역할 수 없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감리회 내 여성들은 이 조항이 여성의 역할을 사모에 제한하고 일자리를 빼앗는 악법이라고 반발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교리와장정의 성차별 조항은 폐지됐지만, 2005년 '부부목회자는 같은 교회에서 담임자와 부담임자로 사역할 수 없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감리회 내 여성들은 이 조항이 여성의 역할을 사모에 제한하고 일자리를 빼앗는 악법이라고 반발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교단 내부의 개혁 진영과 함께 연대 활동도 펼쳤어요. 당시는 도시 산업화 시대라 곳곳에서 도시 빈민 운동이 생겨나고 있었는데요. 교단은 관심도 없고 제도를 마련하는 일에도 손 놓고 있었거든요. 교단의 비민주적인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감리교민주화추진협의회(감민추)가 조직됐어요. 그때 여성·농민·노동자 등이 연합해서 법 개정 운동을 벌였고, 여성 목회자들도 연대하면서 여성 안수 문제를 함께 제기하게 됐어요. 1988년 총회에서는 연대 단체 대표들이 모여 단상을 점거하기도 했죠.

이때부터 교단에서 구체적인 탄압이 시작됐어요. 감민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진급에서 누락시키려고 했죠. 감리회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지방회에서 파송받아 3년간 담임 목회를 하고, 그 기간 동안 지방회 추천을 받은 후 연회에서 과정 심사와 자격 심사를 거치는 진급을 해야 하는데요. 이듬해 연회에서 제 진급을 두고 규칙해석위원회를 열었어요. 저는 정식 연회원이 아닌 준회원이었기에 안건 발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다른 분의 손을 빌어 안건을 상정했죠. 다행히 담임은 할 수 없지만, 진급은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연회가 열리는 3일이 마치 30년처럼 길었어요. 

문제는 총회 단상 점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단 내 정파 갈등과 얽혔다는 거예요. 저와 똑같은 상황의 남자 동료는 진급했는데 결국 저는 진급하지 못했어요. 제 진급 문제가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속한 목사님들의 타협 조건이었던 거예요. 한 남성 목사님이 제게 오셔서 "김 전도사가 진급을 포기하면 가을 총회에서 법이 개정될 수 있도록 약속하겠다. 대신 이번에는 진급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셨어요. 한 여성 사역자분도 "가을에 다 해 준다니까 네가 이번에 포기해라" 하셨고요. 진급은 제게도 절실한 문제였지만 사실 여성 모두의 문제잖아요. 그런데도 일부 여성은 침묵하고, 심지어 차별에 동조하기도 했어요. 결국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진급을 포기했죠.

그해 총회에서 법이 개정됐어요. 정치적인 결론이었지만요. 그런데 법 개정 이후에도 지방회 목사님들이 저를 진급시켜 주지 않았어요. '남편이 세례받지 않았다', '교회가 작다', '여성스럽지 못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게 이유였죠. 소식을 들어 보니 후배들이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대요. 지방회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제가 무리해서 이 모든 일을 밀어붙였다고요. 일부 여성 사역자는 제게 '목사 안수 받는 게 뭐가 그렇게 급하냐'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지방회에서 파송해 주지 않아 2년간 제명 상태가 되기도 했죠. 제가 쌓아 온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됐어요. 철저히 혼자가 된 거죠. 아무도 제 편이 돼 주지 않았어요. 그때 받았던 아픔이 굉장히 커요. 교단 내 뿌리 깊은 가부장성이 여성 간 연대를 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거예요.

여성 안수 운동은 나의 목회, 신학, 해방
1995년 목사 안수 당시 가족들과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제공 김명희 목사
1995년 목사 안수 당시 가족들과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제공 김명희 목사

저는 1995년 뒤늦게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법이 개정된 후 6년 만에요. 일반적으로 목회 시작 3년 후면 안수를 받게 돼 있는데요. 저는 1986년에 교회를 개척했으니 그 과정을 세 번 거친 셈이에요. 남자 동기들은 이미 목사가 되고도 남았는데, 저는 여자이고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목사 안수를 받던 날에는요. 정말 하루 종일 울었어요. 제가 울려고 한 게 아니라 아침에 가서 끝날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거예요. 사진이 잘 나오려면 눈물이 그쳐야 하는데 얼굴은 빨갛고 눈은 충혈되고. 지금도 친구들이 찍어 준 사진 보면 다 나와 있어요. 제가 1980년부터 여성 안수 운동을 시작해서 15년 만에 안수를 받은 거거든요. 법 개정을 위해 싸워 온 역사가 고스란히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목사 안수와는 달랐죠. 법이 바뀌었다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을 바쳐 이걸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결혼과 목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후배들에게 열어 줬다고 생각했죠.

저에게 여성 안수 운동은 목회이기도 하고, 신학이기도 하고, 여성 해방운동이기도 했어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어요. 여성 안수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에요. 여성 안수를 도입하지 않는 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후에도 교단에 악조항이 많이 생겼어요.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심방전도사를 교역자로 인정하지 않는 문제나, 한 교회에서 부부 목회를 못 하게 하는 것들이요. 이 법을 만들 당시 입법의회에 여성 리더십이 없었던 거죠. 이를 위해서라도 여성 할당제가 필요해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출발선이 다르거든요. 남성 중심 시스템이 곳곳에 자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매번 기회를 차단당해 왔어요. 할당제는 여성과 남성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제도예요. 지금은 성별·세대별 15% 할당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사실은 더 늘려야 해요. 여성 할당제를 반대한다는 건, 100개 가진 사람이 하나 내주면서 아까워하는 거예요.

거기까지 갈 수 있는 여성 리더십을 키워 내는 것도 중요해요. 감리회에 여성 연대가 잘 구성돼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여성 리더십도 다 성격이 다르거든요. 가부장 문화 아래서 각자가 살았던 삶의 환경이 자신의 리더십을 결정해요.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다툼이나 차별이 일어나기도 하고, 이 차별이 여성 전체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해요. 앞으로는 우리가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같은 방향을 가지고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너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차단된 기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여성 안수 운동 과정을 통해 절실히 느낀 거예요.

또 한편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있는 본인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니거든요. 당사자들이 과감하게 일어서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연대는 필수적이지만, 그중에서도 피 흘리는 '한 사람'이 있지 않으면 한계가 있거든요. 이건 제 경험담이기도 하죠. 정말 많이 고통스러웠어요. 여성 안수 운동을 하면서 제 믿음이 정말 많이 성장했는데요. 예수님의 피 흘림이 고스란히 내재화한 것 같아요. 그만한 각오가 없으면 철옹성 같은 가부장성을 헤쳐 나가는 건 정말 쉽지 않다고 느껴요. 지금의 저는 외롭지 않지만, 30년 전 제게는 동료가 없었어요. 여성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거든요. 이제는 그렇지 않잖아요. 피 흘리고자 하는 자기 고백만 있다면, 어떠한 문제든 여성들이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해요.(계속)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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