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⑧]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전 예장여성회 총무 남금란 목사
| <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남금란 목사(58)는 '연합', '단합', '연대'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60여 년을 이어 온 긴 투쟁 속에서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 여성 안수를 도입하지 않은 교단들에 하고 싶은 말을 전할 때도 이 말을 썼다. 그에게 여성 안수 투쟁은 여성들 간 연합·단합·연대를 몸소 체험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남 목사는 교단 내 여성들이 '여성 안수'라는 깃발 아래 하나로 모였던 때를 회상하며, 활발히 소통하고 격의 없이 서로 의지한 '사랑방'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남금란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되기 전인 1990년 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1994년 총회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될 때까지 여성안수를위한예장여성회(예장여성회)에서 총무를 역임하며 교단 내 여성들과 함께 여성 안수 실현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신학교 졸업 후 목회 현장에 있는 여성 교역자들을 만나면서부터 교회 내 구조적 차별에 눈떴다. 실력 있는 여성 교역자들이 낮은 급여로 평생 열악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뒤 여성을 차별하는 안수 제도를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여성 안수 도입 이후에도 전국여교역자연합회(여교역자회)에서 후속 작업을 도맡았던 남 목사는, 현재 여교역자회 산하 가정 폭력 피해자 쉼터 '보금자리'의 시설장으로 가정 폭력 생존 여성들의 회복과 자립을 돕고 있다. 예장통합 '1호 여성 목사'인 김예식 목사(예심교회)와 함께 강남노회 여성위원회 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교회와 사회를 넘나들며 여성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금 와서 여성 안수 이야기를 하라니까 새삼스럽다. 우리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가 되게 자연스러운 게 됐다"라면서도 인내와 열망으로 가득했던 지난 투쟁 이야기를 들려줬다.
| 희생되는 여전도사들 |
지금 생각해 보면 순진했던 것 같은데, 처음부터 목사가 될 생각은 아니었어요. 신학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죽음 너머 세계는 어떤 것인지 질문하는 학문이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그런 질문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에 반드시 부딪히게 돼요.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다 답해 주지는 못하거든요.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가 없어서 신학 공부를 하려면 장신대학교에 들어가야 했어요.
목사가 꼭 돼야겠다는 동기로 학교에 간 건 아니었지만 가서 보니 서러운 게 있었어요. 남자들은 목사가 되는데 여자들은 평생 전도사로 있어야 하잖아요. 제가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작은 예지만 이런 일도 많았어요. 학교 식당에 가면 일하시는 분들이 남자 전도사님들에게는 아들처럼 언제나 밥을 챙겨 주고 못 먹을까 봐 걱정해 주셨는데요. 여자들은 조금만 늦게 가도 한 소리씩 듣고 그랬어요. 교회 가면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 목사님 대접에는 지극정성이시잖아요. 그런 게 학교에서부터 있었던 거죠.
그래도 신학교에서는 특별히 차별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학교를 졸업한 뒤, 현장에서 목회하고 있는 여성 교역자들과 만나다 보니 차별이 실제로 보이더라고요. 당시 여성 교역자들은 대부분 심방 전도사님들이셨어요. 전도사는 담임목사의 의중에 따라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했어요. 우리 교단 역사를 보면 여성들이 교회 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했는데도 여성 교역자들은 법적으로 임시직이었던 거죠. 남성 전도사들은 잠깐 전도사로 생활하다가 목사가 되고 담임 목회를 하게 되는데요. 여성 부교역자들은 담임 목회의 길이 막혀 있으니 은퇴할 때까지 담임목사에게 예속돼 있었던 거예요.
여성 전도사님들 중에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산골이나 섬으로 가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교회를 일궈 놓으면 노회에서 남성 목사를 파송하기도 했어요. 교인들이 축도를 할 수 있는 남성 목사를 원하니까요. 그러면 또 아무런 대책 없이 해고당하는 거죠. 여성 전도사는 급여도 남성 목사의 ⅓ 정도밖에 못 받았어요. 노후 대책을 세울 수 없었죠. 그래서 병에 걸리거나 은퇴했을 때 빈곤 계층으로 떨어지는 독신 여성 교역자가 많았어요.
교회에서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여성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부르지 않았어요. 전임 사역 자리는 남성에게만 주어지다 보니, 여성들도 아예 처음부터 특수 목회를 하거나 기관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니면 주일에는 교육전도사를 하고, 주중에는 별 대책 없이 공부만 계속하면서 학위를 따는 분이 많았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학대학원을 나온 고학력 여성들의 능력이나 전문성이 현장에서 별로 쓰이지 못하고 사장된다고 느꼈어요.
현장에는 이런 애환이 참 많았어요. 제가 여성 안수 운동을 했던 거는요. 의식화돼서라기보다는 '저분들은 정말 목회해야 하는 분들인데, 저렇게 어렵게 지내는구나' 하는 마음이 막 일어나서였어요. 심방을 하면 많이 걸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다리에 병이 생겼는데도 노후에 그저 버려지는 삶, 교회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사는 분도 계셨고요. 성폭행당했지만 말할 수 없는 교회 분위기 속에서 끝까지 침묵하며 혼자 고통당하고 있는 분도 계셨어요. 교인들이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 전도사들이 희생양이 됐던 거죠. 정말 많이 울면서 이 일을 했던 것 같아요.
| 교단 내 여성들이 하나 되어 |
예장통합에서는 이전부터 평신도 조직인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여전도회)와 여교역자회를 중심으로 여성 안수 운동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여성 안수 운동을 해 온 거죠. 여전도회는 각 노회가 보다 많은 여성 안수 청원을 할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주로 활동했고, 여교역자회는 여성 지도력을 훈련하거나 여성 목회 안내서 같은 책자들을 발간했어요. 초교파적으로 여성들과 연대 활동을 하거나 사회 여성 단체들과 협력하는 역할도 했고요.
예장여성회는 1989년 결성했어요. 처음에는 여성안수실천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는데요. 여교역자회 회원 중에서도 신대원을 막 졸업한 젊은 여성 교역자들의 모임이었죠. 저는 당시 총무를 맡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서명운동도 하고 공청회를 열어서 여성 안수를 홍보·교육하는 활동을 했고요. 여성안수공동대책위를 조직해서 초교파적인 연대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여교역자들의 현장 목회 이야기를 담은 사례집을 내기도 했고요. 교단 총대들에게 직접 손 편지를 쓰고, 매스컴을 이용해 여성 안수 필요성을 알리기도 했죠. 총회 현장에 찾아가서 단식 농성을 한 적도 있고, 피켓 시위, 침묵시위를 하기도 했어요. 아주 작은 조직이었지만 정말 알차게 일했어요.
이 모든 것을 예장여성회의 힘만으로 한 건 아니었어요. 여전도회, 여교역자회, 예장여성회, 여신학자협의회 등 모두가 똘똘 뭉쳐서 모든 일을 같이했어요. '서로 방식은 달라도 같이 가자', '천천히 가더라도 함께 가자'는 마음으로요. 다른 진보 교단에서는 일찍이 신학적으로 여성 안수 근거를 마련하고 여성 안수제를 도입했잖아요. 저희는 늦기는 했지만, 60년 넘게 싸우면서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 얻어 낸 성과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역사적인 유산인 거죠. '여성들이 하나 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구나' 하는 믿음의 고백을 직접 체험한 거예요.
| 1만 개가 넘는 손편지를 쓰다 |
1978년 총회에서 여성 안수가 투표에 부쳐졌는데, 11표 차로 부결됐어요. 굉장히 오래전 일이잖아요. '이거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표 차가 벌어지더라고요. 1989년에는 찬성표가 더 많았는데도 과반에 못 미쳐서 부결됐고요. 1991년에는 3년간 더 이상 청원하지 말라는 결의를 하기도 했어요. 그때 정말 크게 실망했죠. "우리끼리 교단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일부 여성 교역자는 여성 안수를 주는 교단으로 가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기득권자들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약자들의 단결을 통해서만 권리를 얻을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상기하기 시작했어요. 구체적으로 '여성 교역자들에게 힘이 필요하구나', '우리가 단결해야 하는구나'를 뼈저리게 느낀 거죠. 역설적으로 여교역자들이 더 열심히 모이는 계기가 됐어요. 선후배가 모이니까 자연스럽게 교회 현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나누며 고충들을 들어 주고, 서로 격려도 하고, 같이 놀러도 가고, 밥도 먹고 했어요. 여성 안수라는 공동의 목표가 여교역자들을 끈끈하게 매는 사랑의 줄, 위로의 공간이 된 거죠. 인내한 시간이 길었지만, 무의미하게 실망만 하는 시간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우리가 성장하고 연합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여성 안수를 청원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어요. 선배들은 치리당할 걸 각오하고 청원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청원하고 부결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여성 교역자들이 '더 이상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신학적·성경적 연구를 세상에 많이 내놨어요. 열띤 토론도 하고요. 그래서 여성 안수가 통과될 무렵에는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신학적 근거에 반론을 제기하는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어요. 신학교 교수님들이나 일반 목회자들도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의견을 많이 내면서 여성 안수가 더 이상 신학적·성경적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겼죠.
다만 가부장적 문화나 성차별적 인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안 그래도 목사가 이렇게 많은데 여성들까지 목사가 되면 남자들이 설 자리가 좁아진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생리하는 여성은 강대상에 오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셨죠. "세상의 방식으로 시위하는 것은 비신앙적이다", "교회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고요. 여성 교역자들이 총회를 방청하고 시위할 때 총대들에게 이런 말을 듣기도 했어요. "나한테 잘 보이면 봐주고, 못 보이면 어림도 없다"고요.
1994년 79회 총회 때 여성 교역자들이 총회 방청석에 앉아 있었는데요. 과반수인 661표를 넘기면 여성 안수제가 통과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발표하시는 분 입에서 "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 많이 울었어요. 탄성도 지르고, 얼싸안기도 하고. 어떤 분은 그 자리에서 막 절을 하시기도 했죠. 기쁨도 컸고 감동도 컸어요. 그만큼 오랜 숙원이었으니까요. 그 당시 예장통합의 여성 안수 통과는 국내외적으로도 매우 큰 이슈였어요. 축하나 축전이 쇄도했죠.
근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듬해 전국 봄 노회에서 헌법 개정을 위한 수의 과정이 남아 있었어요. 전체 노회 ½과 노회원 ⅔가 받아 줘야 헌법이 개정되는 거예요. 그래서 1994년 겨울 여교역자회 사무실에서 1만 개가 넘는 전통 문양 책갈피를 직접 만들었어요. 전국 노회원들에게 성탄절 선물로 보냈죠. 손 편지도 직접 하나하나 썼고요. '총회가 결정한 이 사안을 노회가 받아 주십시오'라고요. 고생 많이 했죠. 너무 감격에 겨워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노회 수의까지 통과되고, 1996년 5월 여성 목사님 19명이 탄생했어요. 저는 좀 더 심사숙고한 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1998년 안수를 받았는데요. 그전에도 여성 목사 안수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제주도까지 가서 축하해 주고 그랬어요. 그때마다 감동이 밀려와서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남이 안수받는 것만 봐도 좋았어요. 이제 우리 여성들도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사를 마음껏 활용하고 발휘할 수 있겠다는 열망이 차올랐어요. 물론 여성의 권리는 하나님이 여성을 만드실 때부터 이미 부여해 주신 거예요. 여성 안수는 새삼스러운 것도, 남성들 마음에 들어서 받아 낸 것도 아니죠. 여성들도 명실공히 남성들과 동등한 동반자로서 하나님 뜻을 펼쳐 나갈 수 있다는 걸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것뿐이에요.
| 여성 안수 도입 이후에도 여성 지도력은… |
여성 안수 통과 이후 여성 사역자들의 처우가 좋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봐도 여교역자들의 평균 임금은 남성에 비해 많이 낮거든요. 사회와 비교하면 훨씬 더 떨어지고요. 임지도 부족해요. 여성 안수 이전 상황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거죠. 여성 교역자를 위한 경제적·행정적·심리적 지원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지도력도 개발해야 해요. 에큐메니컬 운동, 노동, 농촌, 생태계, 통일, 타 종교, 인권, 복지, 언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 지도력을 개발하고 재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또 여성들이 서로 인정해 주고, 밀어주고, 지원하는 '연합'이 여전히 가장 중요해 보여요. 요즘에는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개별화해 있어서, 연대하는 힘이 약해지고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식이잖아요.
총회 차원에서는 여성위원회나 여성 총대 할당제를 법제화해야 해요. 작년 총회에서 총대 1500명 중 여성은 34명밖에 안 됐어요. 장로님이 24명, 목사님은 10명이었죠. 여성 총대 할당제는 매번 부결되고 있는데요. 여성 교역자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여성 안수를 도입하지 않은 교단은요. 교단 내 여성들 간 협력과 소통이 필요해요. 한 사람보다는 많은 사람의 힘이 더 셀 수밖에 없잖아요. 초교파적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남성들이나 교회 밖 사람들이더라도 모이면 모일수록 힘은 커진다고 생각해요. 또 이미 여성 안수를 주는 교단들이 축적해 온 신학적 작업과 경험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충분히 활용하면 좋겠어요. 일단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의 의식을 높이는 일을 해야겠고요. 목회자 자신의 실력과 영성도 향상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을 '조직적'으로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 봐야 합니다. 기도도 해야 하고요. 금식도 하고요. 시위·서명·교육도 하고요. 노력은 헛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모든 과정이 여성들의 힘을 모으고 하나가 되는 과정이에요. 마지막으로 '개혁 교회'는, 과거에 한 번 개혁함으로써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라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계속)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